진짜 부족한 선교사 (짧은 간증문) > 남은자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진짜 부족한 선교사 (짧은 간증문)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재성선교사 댓글 0건 조회 37회 작성일 20-10-03 07:11

본문

* 진짜 부족한 선교사

 

저는 우크라이나에서 사역하는 한재성 선교사입니다. 선교사라는 호칭으로 부모형제 고국을 떠나 사역한 지, 벌써 24년이 지났네요. 그간 제게는 하나님께서 인도해 오신 저의 삶이 뒤돌아 보면 모두가 은혜라 고백되어 집니다.

 

첫 아이가 돌이 채 지났을 무렵, 저희 부부는 갓난 아이를 등에 업고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땅으로 선교의 부푼 꿈을 안고 떠났습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카자흐스탄은 어두웠고, 밤길을 다니기가 두려울 정도로 치안이 좋지 않았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민둥산과 마른 풀의 광야가 전부였습니다. 겨울은 어찌나 추웠는지, 특별히 97년도 겨울은 5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추위였지요. 하긴 거기는 카자흐스탄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도시였으니까요.

 

갓 서른이 넘은 초년병 선교사였던 저는, 젊은 패기 하나로 무서울 게 없이 돌아다녔습니다. 둘째 아이 출산이 임박했음에도, 저는 믿음으로 아내와 첫 아이를 집에 두고, 청년들을 인솔하여 키르키즈스탄에서 열리는 청년연합수련회로 떠났습니다. 결국, 제 믿음과는 상관없이 아내는 홀로 둘째를 낳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잘못한 일이라 두고두고 후회스러운 일이 되어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어린 두 아이가 있음에도 저는 끈임없이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였지요. 집에 사람을 데리고 오면 아내는 아무소리 없이 항상 불평없이 음식을 만들어 내어 주며 섬겼습니다. 집은 또 얼마나 이사를 자주했던지요. 언제든 필요하다고 하면 짐을 쌓아 도시를 움직였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할 것 같습니다. 가는 곳 마다 외국인으로서 겪어야 하는 신변의 안전은 보장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딸듸꼬르간 지역에서의 교회개척 이후, 학생비자의 신분으로 종교활동을 한다는 보고서가 종교성에 올라가졌고, 경찰의 심문조사 이후, 3일안에 추방명령을 받았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자란 자부심으로 만든 나무 강대상을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주님은 제게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는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태권도 전문인선교사로 현지의 청소년들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서 카작대표팀과 함께 참여하여 메달도 획득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추방뿐이었습니다.

 

다시 돌아 온 고국 땅에서 반갑기 보다는 아직도 선교의 마침표를 찍지 못한 실패한 선교사 같은 죄책감이 들던 당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제 저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주님.’

 

주님은 저에게 주저하지 않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필리핀으로 가서 네가 빚진 사랑을 갚으라.’ 필리핀은 선교의 선자도 모르는 저를 선교사로 불렀던 땅이었습니다. 93년도부터 첫 단기선교를 시작했던 땅이었지요. 그 응답을 받고는 저 역시 주저하지 않고 카작에서 추방된 지, 두 달 만에 다시 보따리를 싸 필리핀으로 들어갔습니다.

 

필리핀은 정말 1년 내내 무더위와 싸웠던 기억 밖에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부족한 저를 통해 산타크루즈 지역에 열방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태풍이 불었다 하면 온 동네가 허리춤까지 차 오르는 물난리를 겪곤 하는데, 그래도 교회가 쌀이라도 나눠 주야지 하며 있는 대로 쌀을 사서 나눠주고 돌아옵니다. 그 바람에 아내가 댕기에 걸려 죽다 살아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잊지 못할 분은 당시 병원비 30만원을 기꺼이 보내주신 집사님 한 분이십니다.

 

그렇게 여름나기 한 계절로 필리핀에서의 만 4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주님이 나를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보내주시리라 믿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카작에서 저를 부르는 동료 선교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형님, 여기로 와서 저와 함께 일해요.’ 이 한마디에 형식상의 대답, ‘그래 고마워. 한 달만 기도할 시간을 다오.’ 했습니다. 사실, 마음속에서는 이미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내의 동의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한 달 동안 아내에게 함께 다시 카작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사실, 그녀는 원치 않았지만, 남편이 그토록 원하였기에 결국 응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필리핀의 사역을 부랴부랴 다른 사역자에게 위임하고는 카작으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다시 카작에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 전에 추방명령을 받았을 당시, 3일 안에 떠나면 블랙리스트에 올리지 않겠다는 당국의 선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다시 카작에 들어갈 때에는 우리 네 식구 모두의 여권 영문이름의 철자를 살짝 바꾸어 재입국을 시도했습니다.

 

꿈에 그리던 카작 땅에 돌아 온 그 해, 4월은 아직도 눈이 녹지 않아 있었습니다. 기나긴 경울, 황량한 벌판 뿐 인, 그 땅이 왜 그렇게 저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너의 푸른 가슴 속에 십자가의 흔적있다면, 주 위해 이제 일어나 너의 삶을 주께 드려라. 오랫동안 꿈꿔왔던 그 나라 이제 곧 오도록, 우리 주의 은혜의 강, 이 땅 흔들며 흐르도록. 하나님의 눈물을 가진 자 일어나 주님을 따르라. 너의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면, 온 세상 주 영광 보겠네.’

이 찬양이 저의 고백이었고, 제 심장을 뛰게 했습니다.

 

그렇게 카작에 돌아 온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았던 어느 날 아침. 두 괴한에 의해 아내는 손발이 묶인채로 둔기에 맞아, 다시 돌아간 그 땅에서 순교자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건의 현장에서 저 역시 둔기로 머리를 맞았지만 주님은 저만 살려주시고 아내는 데려가셨습니다. 죽지 않고 산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그녀와 함께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 겨우 초등학교 1학년, 2학년에 다니던 두 딸을 놓고는 사랑하는 아내는 하늘로 훌훌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 후, 전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사람들이 잠든 밤은 저에게는 후회와 자괴감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순교자의 남편으로 저를 알아봐 주었지만, 정작 저 자신은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그저 못난 남편에 불과했습니다. 고향 교회에서부터 나를 오빠라 부르며 일편단심 나를 사랑해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그녀를 지켜주지도 못할거면서 왜 내 사명이랍시고 억지부리며 모진 곳까지 데려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그녀를 그 땅의 제물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벌써 16년이 지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지만, 하나님의 가슴과 제 가슴과, 그리고 그 사람을 낳아 주신 어머니의 가슴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렇게 패인처럼 2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동대 채플 이후, 그곳에서 뜻밖의 만남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원정윤입니다.’ 제 눈 앞에 한 자매가 이렇게 인사해 왔습니다. 그녀는 포항시립 연극단 상임배우로 활동중인 아름답고 발랄한 처자였습니다. 교회에서는 13역을 한다고 목사님들에게서 칭찬이 자자했지요. 그런데 우연한 만남 속에서 하나님은 두 사람의 마음에 배우자로서의 분명한 응답을 각자에게 주셨습니다.

 

그렇게 그녀와 저는 다시 부부로서 하나님께서 하나로 묶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땅, 구소련 지역이었던 땅끝나라 우크라이나로 다시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욥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심 같이, 저에게도 그녀를 통해 삶의 회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제는 장성한 두 딸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였고,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후, 주님은 부족한 저에게 여섯 명의 딸을 더하여 주시더니, 올 해 아홉째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그대로 받고 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부족한 구석이 많은 선교사입니다. 남편으로서 그렇고, 아비로서도 그렇습니다. 교회앞에서도 여전히 부족한 목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부족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에 눈물만 나옵니다.

 

두 해 전에는 저희 집이며 센터인 건물에 불이 나서 전소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불이 난 당일, 모든 가족은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를 진행하고 있었기에 모두 무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연신 감사 밖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희의 마음을 보셨는지, 주님은 그 후, 신속하게 화재난 건물을 복구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복구비로 예배당 건축의 말미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또 아이들 학비도 전혀 모르는 미국의 어떤 크리스챤 가족으로부터 1년 장학금도 받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한 사람을 잃어 보니,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을 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또 저의 삶 가운데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저는 모릅니다. , 그렇습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라는 찬양의 가사와 똑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의 삶을 주님이 인도해 가고 계시다는 겁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주님 부르신 그 곳에서 다만 복음에 합당하게 살다가 이 땅을 떠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아멘.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843건 1 페이지
남은자이야기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843 한재성선교사 33 10-16
842 한재성선교사 28 10-15
841 한재성선교사 13 10-13
열람중 한재성선교사 38 10-03
839 한재성선교사 38 09-24
838 한재성선교사 22 09-22
837 한재성선교사 56 09-15
836 한재성선교사 61 09-05
835 한재성선교사 72 08-15
834 한재성선교사 42 08-13
833 한재성선교사 31 08-12
832 한재성선교사 29 08-11
831 한재성선교사 21 08-11
830 한재성선교사 20 08-07
829 한재성선교사 29 08-05
게시물 검색

땅 끝에 남은자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Copyright © anbc.pe.kr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